RED
160 0 24-06-28 11:45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처음에는 조금 떨어져서 바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곁눈질로 너를 볼텐데. 너는 말을 하지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아도 돼…….
<어린 왕자>에서 길들인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합니다. 친구가 된다는 건 여우의 말처럼 길을 들이는 일이지요. 풀 숲 너머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기 위해 조심스레 발자국을 떼고, 한번 두 번 같은 곳을 밟아 갑니다. 그러면 당신의 집으로 가는 길이 만들어 지지요. 그렇게 발자국이 모여 들이는 것이 길입니다. 인내심이 없다면 결코 발자국을 모을 수 없습니다. 말로 가벼이 마음을 얻어 만들 수 없는 것이 길을 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기숙 학교에서 그리고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건 두가지를 길들여야 합니다.
첫 번째는 나와 함께하는 친구들입니다. 갑작스레 만나게 된 인연들이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일 리는 없지요. 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멀어지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낯선 풀 숲에 길을 들이듯 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선입견으로 친구를 보기도 하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만나다 보면 상대방의 소중한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나를 길들여야 합니다.
내 마음은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남을 통해 나를 알아가야 하지요. 내가 저 친구의 모습을 부러워 하는 구나. 난 누구를 닮고 싶구나. 난 어떤 모습을 싫어하는 구나. 등등입니다. 타인은 언제나 나를 만나게 하는 거울입니다. 타인과 소중하게 관계를 하다보면 오히려 내가 더 소중히 나를 만나고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며칠 전 졸업생 채원이와 코치실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깔깔 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중 자연스럽게 추억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채원아 나는 니가 하은이와 친해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
이 말을 듣고 채원이가 깔깔거리더니 “저도요 코치님.”이라고 합니다.
중 1때 레드에 들어온 채원이 그리고 중2때 레드에 들어온 하은이입니다. 둘은 당시 담임인 제가 보기에도 너무 성향이 달랐습니다. 온통 대장처럼 레드를 휘젓고 다니던 채원이와 다르게 하은이는 조용하게 애니 덕질은 하는 친구였습니다.
역시나 둘 사이에는 긴 기간만큼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다투고 울고 화해하고 이해하고, 오해하고 미워하고 절교하고...... 그런데 둘은 서로 끝까지 조심히 길을 들여 나갔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하은이는 조용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채원이와 똑같이 레드를 휘젓고 다니는 ‘웃음 사냥꾼’이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장미와의 갈등으로 자신의 별을 떠나며 시작되는 이야기 입니다. 갑자기 날아온 장미, 어린 왕자와 장미는 서로를 충분히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온갖 까다로운 장미의 요구와 묵묵히 그걸 지켜주는 어린 왕자의 모습에서 수없이 많은 레드의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꽃의 말을 듣 게 아니었어" 어느날 그는 내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꽃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돼. 그저 바라보고 향기를 맡아야지. 내 꽆은 내 별을 향기롭게 해주었는데 나는 그걸 즐길 줄 몰랐어." ... "그때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 거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꽃을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나를 향기롭게 해주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었어.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어설픈 거짓말 뒤에 따뜻한 마음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린 왕자는 지구별에서 만난 비행기 조종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까이 있을 때 꽃이 소중 했다는 걸 말입니다. 꽃의 말 너머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그제서야 떠올립니다. 말 너머의 진심을 보았기에 자신이 원하는 거리가 아니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꽤나 자주 다툽니다. 그런데 다툼의 원인을 말로 따라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결국 서로의 속 마음을 들여다 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관계에 대한 조급함으로 서툰 실수들을 합니다. 뒤에서 누구 욕을 한다거나 없는 말을 지어 내기도 합니다. 대부분 실제로 상대방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친해지고 싶은 데 뜻대로 안되거나 사랑을 받고 싶을 때입니다. 관계 맺는 방법이 아직 서툴기에 배워가며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힘들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겨낼 수 있는 아이들을 믿고 오히려 천천히 서로 길을 들일 수 있도록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다툼과는 다르지요. 앞서 이야기 했듯 아이들은 관계를 통해 ‘나’도 길들이고 있는 중이니까요. 갈등은 마음 아프지만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경험입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나다보면 친구와의 갈등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억지로 화해시키는 것보다 서로의 소중함, 그리고 오해의 말끝을 따라가지 않는 ‘이해’를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지요. 말은 언제나 마음을 전하기에 충분치 않은거 같습니다. 그리고 때론 어쩌면 꽤 자주 우리는 마음과 반대로 말을 하곤 합니다.
조금씩 길을 들이는 관계, 그리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서로의 거리를 지켜주는 관계. 레드 아이들은 오늘도 조금씩 나와 너를 소중하게 길들이고 있습니다.
장미를 만나기 위해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어린왕자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