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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칼럼

2022 레드칼럼 14 - 몽블랑 만년필, 그리고 교사의 품격

RED

16 0 22-06-13 08:52



제가 대학원에서 학위논문지도를 받고 있던 시절의 일입니다. 


저의 논문을 지도하셨던 지도교수님은 학과에서도 꽤나 까다롭기로 소문난 분이셨습니다. 논문학기 때, 제가 쓴 논문을 중간점검 받으러 갈 때마다 교수님은 자주 제가 쓴 논문 원고에 매섭게 펜을 휘둘러대시며 ‘자네 이 부분 다시 한 번 자료 찾아보고 조사해오게!’라고 하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열심히 밤새가며 자료 찾아가며 공부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야박하고 혹독하게 하시는지 싶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논문지도를 받으러 가면, 그 교수님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제 논문지도를 하실 때 마다 꼭 책상에서 만년필을 꺼내서 쓰시곤 하셨다는 것입니다. 책상 위에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짜리 볼펜들도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논문지도 받으러 가면 반드시 그 만년필을 꺼내서 쓰셨습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교수님께서는 저의 논문지도를 하실 때 마다 쓰셨던 그 만년필은 약 70~80만원 상당의 이탈리아제 오로라 만년필이었습니다.

 

저는 올해부터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만년필 수집입니다. 다이소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3천원짜리 보급형 만년필부터 시작해서, 수십만 원, 심지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저는 다양한 브랜드의 만년필을 씁니다. 이 중에서도 제가 가장 애용하는 제품은 몽블랑(Montblanc)의 제품, 그 중에서도 마이스터스튁 르 그랑(Le Grand) 146모델을 가장 애용합니다.

 

몽블랑의 만년필은 마치 ‘가방=루이비통’, ‘향수=샤넬’과 같이 세계적인 명품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지요. 만년필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 선수들도 ‘몽블랑’이라는 브랜드네임은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사실 벨트나 지갑 같은 남성용품 브랜드로 많이 알고 있답니다.)


세상을 바꾼 수많은 역사적 순간에 늘 함께 있었던 만년필이라는 수식어도 있고, 수많은 국내외 많은 명사들이 몽블랑의 만년필을 애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박경리 소설가의 대표적인 소설 ‘토지’의 원고가 몽블랑 146 만년필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무소유’라는 책으로 유명한 법정스님도 글을 쓸 때 항상 몽블랑 만년필을 애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박두진, 박목월 시인도 작품활동을 할때 몽블랑을 애용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기업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도 몽블랑 만년필을 즐겨썼는데, 회장이 즐겨쓰는 걸 넘어서 삼성에서는 신임 임원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해 주는 전통까지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만큼 전통과 품격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우리 선수들에게 손편지를 써 주거나, 굿나잇페이퍼로 필담교류를 할 때마다 바로 이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합니다. 얼마 전 1학기 중간고사 후 학습코칭 때에도 저는 우리 선수들에게 학습코칭 멘트를 직접 작성해 주면서, 맨 마지막에 서명을 할 때도 제 옆에는 늘 저의 몽블랑 만년필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유성볼펜은 종이 표면에 기름을 묻혀 글씨를 냅니다. 잉크가 종이 속에 스며들지 않고 유성잉크 자체의 흡착력으로 글씨를 내지요. 반면에 만년필은 종이를 긁어 그 긁은 자리에 잉크가 종이 안으로 깊게 스며들도록 하여 글씨를 냅니다. 거의 마치 조각칼로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것이 제가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잉크를 종이 깊이 새겨넣는 만년필처럼 학생들을 대할 때 더 깊이 있게, 표면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저 또한 그 깊은 진심과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마주하겠다는... 이렇게 만년필을 통해서 저는 교사의 삶의 태도와 품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또 배워갑니다.

 

제가 굳이 몽블랑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절대로 제가 명품에 집착을 하거나, 남들에게 ‘나는 이 비싼 만년필이 있어! 당신들은 이거 없지?’하면서 으스대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몽블랑 만년필은 흔히 ‘뚝심’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1950년대 즈음에 볼펜이 발명되고 많은 필기구 생산업체들이 만년필 생산을 포기했던 시절에도, 심지어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상황에서도 몽블랑은 끝까지 만년필 생산을 고수했고,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명품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의 말 한마디, 제가 써주는 글 하나가 어쩌면 그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꿀 수도 있다는 책임감,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해내야 하는 교사의 위치, 제게 만년필은 그러한 선생의 위치와 품격을 알아차리도록 해 주고, 교육자로서 지녀야 할 진정성과 책임감,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교육자가 지켜내야 할 ‘뚝심’을 상기시켜 주는, 제게는 마치 '기사의 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도 제 출근길에는 육각형의 백설마크가 작게 새겨진 파우치에 저의 몽블랑 만년필이 함께합니다. 제가 레드선수들 앞에서 이 만년필을 꺼내들 때 마다 그렇게 저의 대학원 논문학기시절 제 지도교수님의 마음이 되어 봅니다. 아마도 지도교수님이 제 논문을 지도하면서 가지셨을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자를 향한 존중과 진심, 그리고 사랑 말입니다.



2022년 6월 3일

레드스쿨 영어과 교사 이한별 (프라임 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