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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칼럼

2022 레드칼럼 05 - 레드스쿨이 안동종택 여행을 떠나는 이유

RED

337 0 22-06-1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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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 오는 3월의 마지막 주. 레드스쿨에서는 학년별로 학생들 스스로 계획을 세워 각지로 만리여행을 떠납니다. 다만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4학년 학생들은 레드스쿨 프로그램 일환으로 안동 종택으로 만리 여행을 떠납니다. 



영주의 소수서원,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노송정, 학봉종택, 임청각, 그리고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안동 하회마을 등 안동지역에 있는 종택 탐방을 교육과정으로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레드스쿨의 설립과 이념이 여기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레드스쿨 설립 이념인 무지와 가난과 허약으로부터 탈출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시던 설립자께서는 안동지역의 여러 종택을 통해서 그 해법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녀들의 “교육”입니다. 안동 지역 종택들이 수백년간을 이어오면서 현재까지 우리 사회의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격언은 중국의 관자가 한 말로써 ? “일년지계 막여수곡(一年之計 莫如樹穀), 십년지계 막여수목(十年之計 莫如樹木), 종신지계 막여수인(終身之計 莫如樹人),”



“곡식을 심으면 일년에 한 번 수확할 뿐이고, 나무를 심으면 십년을 두고 수확할 수 있으며, 사람을 기르면 평생을 써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사람을 기르고 교육을 시킨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가끔 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국토와 좁은 땅과 자원이 없은 대한민국이 70년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일까?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후에 중국과 일본은 나라와 정권이 바뀌는 상황이 되었지만 조선은 이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도 25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여러 답들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학생들에게 그 바탕에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공교육을 담담했던 향교가 전국에 360여개, 사교육에 해당하는 서원이 1000개가 조선의 교육의 중추가 되어 사회를 유지 발전시켰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학부모님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짧은 시간에 대한민국을 발전시키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 국가, 좁은 국토, 빈약한 자원속에서도 어느덧 선진국에 다가서고 문화적으로 K문화가 발전하는 모든 바탕에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레드스쿨에 자녀들을 입학시킨 학부모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하였는지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많이 공감되고 소중함을 느낍니다.



레드스쿨에서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은 자신이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이 핵심입니다. 레드 아포리즘 수업, 만리여행, 그래드 투어, 솔로 타임, 국토순례, 롤모델 만나기 등을 통해 10월에 성인식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포부를 학부모님 앞에서 당당히 밝히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 디자이어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달아 된다고 생각됩니다.



안동종택 탐방은 그 지역의 여러 종가집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는지를 알아봄으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롤모델이 되는 아주 좋은 경험과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푸른 5월 안동종택에서 어떤 색깔로 롤모델을 만날지 기대하면서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인 청계 김진 선생의 자녀 교육에 대한 글과 그 후손들이 종택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감하려 합니다.



2022년 4월 2일

레드스쿨 사회과 교사 유호준 (삼두매 코치)





이야기가 있는 고택



의성 김씨 종택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의 주인공

청계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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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모두가 학문이 뛰어나고 강직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단는 점은 특히 청계가 어떻게 자식을 교육시켰는지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청계는 아내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일찍 사망한 뒤, 자녀 양육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했다. 그가 자녀 양육과 교육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학봉 김성일이 지은 청계 행장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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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형(약봉)이 과거에 급제한 뒤 바로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슬하에 아이들이 여덟인데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강보에 싸인 아이였다 . 부군께서 어루만져 기르심에 있어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밤에는 좌우로 안아 주시는데 아이들의 어머니 젓 달라는 소리가 매우 애처러워 부군께서 몸소 젖을 먹이시니, 비록 단 젖은 않았으나 젖을 빨면서 울음을 그치곤 했다. 부군에서 이 말씀을 하실 때면 주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계는 집안의 경제력을 키우는데도 적극 노력했으며 , 주위의 가난한 친척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데도 마음을 다했다 . 만년에는 청기현 (영양 )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 연세가 많은데도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고 자식들이 만류하자 “농사는 백성의 직분이다 . 백성이 농사에 게으르면 이는 버림받는 백성이다 . 하물며 제사 지낼 곡식과 처자를 기를 것이 다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냐 ”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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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제사 (기일은 음력 4 월 23일)는 청계 종택 사랑채 대청에서 지낸다 . 제사는 자시에 , 비위 신주를 함께 모시는 합설로 지낸다 . 청계는 제사를 중요시했지만 검소함을 강조했다 . 자식이 없는 큰 아들 (약봉 )의 제사 문제를 염려해 그 동생의 아들로 뒤를 잇게 하고 , 유언으로 청기 (靑紀 )의 별업 (별장 )에 속해 있는 제전 (祭田 )을 영원히 분배하지 못하도록 했다 . 상사의 도구는 모두 검소하게 마련하도록 했고 , 곤궁한 자녀들에게는 제사에 유과 (油果 )과 약과 (藥果 )등을 쓰지 못하게 했다 . 또한 여러 자손들에게 종손을 공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너희들이 소인이 되어 산다면 죽었다고 보겠다 .”



청계는 자식 교육을 위해 자신의 입신양명도 포기했다 . 이것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한 암자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당신이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 벼슬 생각을 버리고 자식 교육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 ”이라고 이야기했다 . 청계는 관상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대과 (문과 )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 교육에 전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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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군자와 소인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군자가 될 것을 주문했다. 자식들에게 항상 강조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해 믿음을 얻은 다음이라야 간언하더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 신하는 차라리 부석진 옥의 조각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어서는 안된다 .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산 것으로 보고 , 소인이 되어 산다면 오히려 죽었다고 보겠다 .”라고 말하곤 했다. 정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지조를 굽히지 말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청계는 다섯 아들 모두 가학으로 기초를 닦게 한 후 퇴계 이황에게 보내 제대로 된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청계는 또한 지나친 물질적 풍요와 엘리트 지상주의를 경계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재산은 300 석 이상 갖지 말고, 벼슬은 당상관 이상 오르지 말 것 ”을 주문하여 유훈으로도 남겼다.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고 분수를 지켜 청빈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원문: https://blog.naver.com/redschool310/22268966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