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
338 0 16-10-28 19:17
아침 7시 레드로 출근하기 위해 평화홀을 나선다. 오늘도 역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짐빠(짐자전거)다. 아침햇살께서 짐빠를 작품으로 설치해 놓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볼 때 마다 잠시 숨이 멎는다. 자전거에 세 글자 ‘아버지’와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찰나의 짧은 순간에 참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내 안에서 올라온다. 먹먹하기도, 불쌍하기도, 원망스럽기도, 그리웁기도... # 나의 아버지와 짐빠 내가 어릴 적 부터 밀짚모자와 밀가루 국수장사를 했던 우리집에는 짐빠가 있었다. 그 짐빠는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후에 까지 우리집에 남아있었다. 밀짚모자를 직접 만들어 파셨던 아버지는 그것들을 짐빠에 싣고 몇 십리가 되는 상점에 까지 배달해주셨다. 짐빠는 우리집의 밥줄이었고 우리들의 교통수단이었다. 43년이 흐른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모자를 만드는 재봉틀에 앉아서 일하던 모습과 짐빠를 타신 아버지의 뒷모습만 떠오른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돈을 벌러 가기에 즐거운 모습이 아니라 힘든 삶에 찌든 아버지의 뒷모습이기에 짐빠는 나에게 즐거운 추억여행이 아니라 늘 안타까움으로 가득찬 가슴 아픈 과거의 잔상으로 다가온다. 마음씨만 좋았던 아버지는 당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금액, 지금의 아파트 두 채에 해당하는 돈을 높은 이자에 빌려다가 외삼촌을 주셔서 떼었기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빚 속에 허덕이다 삶의 재미도 느껴 본 적도 없이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술에 빠져 46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억’ 소리 한마디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나셨다. 그때 내 나이 열여섯,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신 건 땅 한 평도, 전셋집도 없이 ‘세 초등 동생들을 거느린 가장’이란 직함과 지금의 아파트 한 채에 해당하는 200만원이 넘는 빚 덩어리였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한결 같이 자식들에겐 엄하고 정작 자신들은 세상을 원망하고 술에 취해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농사이외는 딱히 먹고 살아갈 꺼리가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아침햇살 아버님과 나의 아버지는 삶이 너무나도 닮았다. 두 분다 시골스럽지 않은 풍모에, 시골에선 나름 똑똑하셨기에 그래도 시골에서 용기를 내어 읍으로 이사를 와서 장사라도 시작했겠지만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술 뒤로 숨으셨던 것 같다. 결국은 46세에 뇌출혈로, 53세에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지만 근본적 원인은 ‘과음’이었다. 그때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많이 원망한 아버지지만 아버지 나이보다 14년을 더 살아 60이 된 나이가 되고 보니 지금 아버지를 만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내가 나보다 어린 불쌍하신 아버지를 나의 가슴에 안아드리고 싶다. 허나 가식과 생각을 벗어버린 나의 속마음을 얘기하자면, 단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 품에 안겨 “왜 그리 빨리 가셨나요?‘ “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 어린 내가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아시는 가요?“ 그리고 나서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싶다. 왜 그리 엄하기만 하시고 한 번의 칭찬을 하시지 않았는지 지금이라도 “수고했다 내 아들아! 동생들 키우고 집안 이끌어 오느라 애썼다” 이 한마디를...... 해가 가고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가 더욱 그리웁고 보고 싶어진다는 걸 내 딸들과 레드선수들은 이해를 할 수 있을까... 후기 : 삶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아버지랑 대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한 시간 이상 대화를 했다. 그날은 바로 아버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이었다. (그리고서 정확히 5시간 후에 아버지는 뇌출혈로 급사하셨다) -땅-